플리🎵 2022. 5. 2. 12:14

 

Day11~13_약이 없다

주말 내내 잤다. 이미 마감 시한을 넘긴 일이 있는데도.
스무 시간씩 잔 것 같다. 뭘 하려고 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내가 몇십년을 느낀 그 기분이다.
청소와 빨래는 오빠가 집에 들어올 시간이 가까워지자 겨우 했다.
자율성이 없다는 게 이런 뜻이다. 강력한 외부 압박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
충동적으로 게임 현질하고 웹툰을 샀다. 웹툰도 잘못 보고 사서 이미 본 회차들을 결제해버렸다.
평소 같으면 '응 나는 문화계의 빛과 소금~' 이러고 희희낙락 넘어갔을 텐데 굉장히 우울해졌다.
이런 결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순간의 '충동'을 못 누르는 이 느낌이 익숙해서 너무 싫은 것이다.
다만 약 없는 이틀 동안 몇 가지를 새롭게 발견했다.

1. 약을 안 먹으면 초콜릿을 먹게 된다. 생각해보니 약을 먹는 동안 초콜릿을 찾지 않았다.
2.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인데, 약을 먹는 동안엔 많이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음악을 들으니 조금 움직일 수가 있었다. 초콜릿, 음악이 도파민에 영향을 주는 것 아닐까? 나는 움직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이런 걸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담배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고.
3. 충동적으로 뭔가 사버리는/해버리는 버릇은 확실하게 약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4. 약 안 먹으니까 낮에 졸리다; 약 먹었을 때 약간 처지는 느낌이랑 확실하게 다르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나는 오전에 정신을 못 차리는 편인데, 약 먹는 동안 그 느낌을 또 금세 잊어버렸었다.
근데 오늘 뼈저리게 느꼈다. 맞아 난 오전에 이렇게 나리작거리고 정신을 못 차렸었지...
또 충동적으로 온라인 TCI 검사를 결제했다. 상담 일자는 다음주인데, 못 기다릴 것 같은 조급함이 또 든다... 이 조급함도 너무 익숙하고, 싫고, 약 먹는 동안엔 크게 못 느꼈던 거라서 정말 너무하다ㅠㅠㅠㅠ 완죠니 호르몬의 노예여 ㅠㅠㅠ

빨리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 오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리고 약물일기는, 내 일지에는 매일 쓰되 블로그에는 2주나 1달에 한번씩 묶어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조각난 정보를 톺아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병원에 얘기할 것도 정리해야 하니까. 그래서 정리해봄.

ADHD 약물 첫 복용 효과를 정리하자~!(메디키넷 5mg)


아주 적은 용량이라 그런지, 나는 많은 ADHD 환자들이 경험했다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뭐가 변하는지에 대한 단서는 얻었다. 실행 기능이 올라간다!
먹고 나서 대략 30분 정도면 잠이 깨는 느낌이 나고, 두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쌩쌩해졌다가, 다섯시간쯤 되면 처지는 느낌이 듬. 처음 3~4일에는 이때 졸렸는데, 졸림은 점차 없어졌음.

1. 식후 복용이 좀 더 효과가 완만하게 오른다

의사선생님이 식후 복용과 공복 복용을 비교해 보라고 하셨다. 식후 복용이 좀 더 효과가 완만하게 오른다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아침잠을 깨고 출근하는 게 너무 우선이라 대체로 눈 뜨자마자 먹었다. 지각은 여전히 자주 했지만, 아침에 멍하니 미적거리는 것이 줄어서 크게 지각하지 않았다. 약을 안 먹은 오늘은 정말 대지각했다. 쓰면서도 정말 한심하다...

2. 딴짓은 그대로, 하지만 돌아오는 것이 수월함

일하다가 주의가 흐트러져 자꾸 딴짓하는 건 크게 좋아지지 않았는데, 다만 원래 일로 돌아오는 것이 비교적 수월했다. 전에 한눈팔기와 미루기에 대한 브런치 글에 큰 도움을 받았다. 글을 안 지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3. 작은 일은 바로 할 수 있게 됨

실행 기능이 올라갔음을 느꼈다. 생각과 행동 사이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지능력을 많이 사용해야 하는 일을 시작하기가 어렵다. 이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는데, 나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은, 또는 신경을 많이 써야할 것 같은 일을 미룬다. 심리상담을 받고 내 마음을 돌아보는 법을 익히면서 내가 두렵게 느끼는 일이 사실 그렇게 두렵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법을 배웠지만, 자동적으로 기피하게 되는 건 아직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잘하고 싶어하는 일일수록, 부담이 클수록 포커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4. 예민, 불안해지는 느낌은 없었음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신, 더 예민해지거나 불안해지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많이 차분해졌고, 사람을 대할 때의 불편함은 덜해졌다. 약 용량이 올라가면 어떨지 모르겠다.
사실 예전에 진단받은 조울증은, TCI 결과를 본 다음부터 오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병이었다기보다 기질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런데 미친듯이 찾아보니 나의 TCI 기질(폭발/경계선), 양극성 장애, ADHD는 양상이 비슷하고 서로서로 공존질병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성인 ADHD에서 흔히 동반되는 진단)
저 기사에서 인용하자면, 양극성 장애 자체는 유병률이 1%로 매우 낮다. 다만 ADHD에서 양극성장애가 동반되는 경우는 4.5~14%로 일반인에 비해 다소 높다. 그래도 우울장애, 불안장애, 물질사용장애만큼 높지는 않다.
그런데 양극성장애로 진단된 성인에서 ADHD가 함께 진단되는 경우가 9~35%라고 한다. 이거는... 무시할 수 없는 확률이다.
ADHD와 동반한 경우 첫 삽화가 일찍 시작된다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를 의심하고 있다.

내가 돌은 새뀌...였을 때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진짜 두번다시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조증 혹은 경조증의 기미를 느꼈을 때 바로 약을 안 먹어도 되는지, 추가약을 바로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몇 년간 우울 문제는 생리 전을 제외하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서는 비정형 우울이 보인다 했고 양극성장애에서는 비정형 우울이 더 흔하다고 해서 놀라기도 했다. 이게 진짜루 오진이 아니엇단... 말인가...? 평생 약 먹는 건 상관없다. 근데 옛날로 돌아갈까 봐 너무 무섭다.

5. 소리가 잘 들림. 물건을 잘 챙김, 시간 관념이 조금 생김

소리는 여전히 모두 들리는데, '이 소리를 들어야지'라고 생각하면 주변 소리가 잦아드는 걸 느꼈다. 몰입을 못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이 감각을 모르는 건 아니었는데, 내 힘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산을 안 잃어버렸어!

6. 할일 리스트를 꾸준히 쓸 수 있게 됨

평소에는 할 일이 머릿속을 스쳐가버린다. 그냥... 계속 스쳐다닌다. 그런데 약을 먹으면 그걸 붙잡아서 할 수 있는 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일단 약물일지를 포함한 노션 일지를 꾸준히 쓴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약을 먹으면 집에 잔뜩 사다 둔 ADHD 인지행동치료 책을 드디어 따라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건 뭔지 모르겠음 기분탓일 수도 있음
원래 노래를 엄청 많이 들었다. 귀에 꽂히는 한 곡만 골라서 듣다가 질리면(보통 1주일 안에 질림) 다음 사냥감을 찾아서 또 무한반복했다. 아침에 씻을 때도 듣고 출근할 때도 듣고 일할 때도 듣고...
근데 약 먹을 때는 일할 때 방해가 되는 느낌이라 노래를 거의 듣지 않았다.
오늘은 약을 안 먹었고, 혹시나 해서 노래를 틀었는데 오히려 이게 일할 때 집중이 된다.
약 먹을 땐 마스크 쓴 채로 이어폰 끼면 내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는데, 약 안 먹은 오늘은...안 들리네... 신기하다.



adhd 관련해서 진짜 인터넷을 바닥까지 긁었는데... 약을 먹었을 때 반응이라던가 공존장애가 비슷한 사람의 글을 찾기가 어려워서 조금 외롭다ㅠㅠ 생각해보면 TCI가 HHL-LMM인 사람 자체도 드문 것 같고... 내가 adhd가 아닌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자꾸 들고. 일단은 약이 도움이 되는 듯하니 킾고잉해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