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ADHD 진단 받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증상이 너무나 궁금했는데, 진단 받고 나니까 약을 먹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다.
나만 이래? 다들 이래? 이거 부작용이야? 아니야? 이게 뭐여??...하는 궁금증이 휘몰아친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약물일기를 남겨보기로 했다.
아마 약의 효과가 드라마틱하고 고양감이 있는 초반에는 열심히 남기다가 안정되면 텀이 길어지지 싶다. 다른 분들 일기도 대체로 그렇더라ㅋㅋ
개인적으로 세운 거대한 목표는 약을 먹는 동안 인지치료의 방법들을 자기화 및 습관화하는 것이다.
약 복용 기간은 의사선생님마다 의견이 조금 다른 듯하다.
성인은 이미 전두엽 발달이 끝났기 때문에 약을 계속 먹어야 한다고 하는 분도 계시고, 1년 정도 바라보라는 분도 계신데, 어쨌든 내 상태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중간 목표는 가계부와 정리된 방, 운동하는 습관, 지각하지 않는 일상을 갖는 것이고,
당장의 쟈근 목표는 약을 꾸준히 먹는 것 그 자체다^^.... 이것도 정말 어렵겠다...
그럼 시작!
Day 1_메디키넷 5mg
오후 12시
ADHD 진단을 받았다.
메디키넷 5mg, 2주치를 처방해주셨다. 아이들이 먹는 작은 용량이라고 한다.
엄청난 변화는 없을 거라고 하셨다. 짜증이 나거나 흥분하게 되는지, 여러 소리 가운데 중요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지, 턱밑까지 닥쳐야 할 일을 하던 것을 조금 더 일찍 할 수 있게 되는지 등을 살펴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한 주는 점심 식후에, 한 주는 오전 공복에 먹어보면서 비교를 해보라고도 하셨다.
오후 1시
집으로 가는 길에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콩국수를 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한 알을 톡 까먹었다.
오후 5시
어이없게도 처음 약을 먹은... 그 순간에 나는 자고 있었다.
졸리지는 않았는데, 우리 고양이가 이불에 편히 누워 야옹거리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오후 다섯시였다^^
메디키넷은 분명 각성제일 텐데. 아무리 적은 용량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제대로 잘 수가 있는 건가?
오후 5시 10분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느낀 것은 고요함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머릿속에서 쉴새없이 재생되던 생각이 잦아든 것을 느꼈다. 기분도 차분해졌다.
보통 나는 '시간을 날렸다'는 생각이 들면 심장이 쿵쿵 뛰고 불안해지는데, 그런 느낌도 없었다.
머릿속에 항상 텔레비전 열몇 대가 켜졌다 꺼졌다 하면서 각자 다른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중 몇 대가 잠시 꺼진 느낌이었다.
오후 6시
세탁기를 돌렸다. 중간중간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다. 그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건 약을 먹어서는 아니다. 난 원래 이렇다. 일상적인(??) 감각이었다. 아무튼 바로 답장을 보냈다. 하나는 바로 처리하고, 다른 건은 내일 처리해드리겠노라 답장했다. 뭔가 생각과 행동 사이에 거리가 많이 좁혀진 느낌.
나는 원래 이런 소통을 극도로 싫어하고 굉장히 긴장한다. 나에게는 난이도가 높은 태스크인데 저항이 많이 없어진 게 신기했다.
6시 반
택배 박스 그대로 한달간 방치하던 새 책 열다섯 권을 책꽂이에 꽃았다.
이건 정말,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책들은 왜 방치되어 있었을까? 책장에 꽂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만들려면 버릴 책이나 중고로 팔 책을 빼내서 자리를 만들고, 거기다 꽂아야 했다. 내게는 너무 거대한 업무(?)였다.
그런데 지나다니기도 불편한 곳에 놓인 박스를 본 순간, 금방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순서가 그려졌고, 그대로 했다.
'그대로 했다'는 부분이 너무 중요하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생각했고, 그냥 했다. 미루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줍는 것도 미루는 사람인데.
그 수많은 미루기 책에 나오던, '그냥 하세요'라는 말이 실제로 가능한 거긴 했구나?
심지어 책 정리하는 동안 딴 길로 새지도 않았다. 원래의 나라면 한참 해찰을 부리다가 포기하든가 대충 끝냈을 텐데...
책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된 김에 책장을 싹 정리하자'는 충동이 들긴 했지만, 오바떨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중간 일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까먹고 말았다... 아마 신랑이 퇴근했을 거고... 밥을 먹었을 거다.)
9시 반
졸리다. 이 시간에 졸리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찾아보니 약 기운이 떨어질 때 졸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어서 그걸 하다 보니 12시가 되었다. 다시 잠이 확 깼다.
이건 평소와 비슷하다. 나는 이상하게 밤 12시가 되면 갑자기 각성해버린다.
그래도 노력해서 1시 30분에 잠들었다.
Day 1 summary
다른 분들의 약물일기에서 본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이 명료하게 보인다거나,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정말 기대했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용량도 적고, 무엇보다도 내가 잤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스스로가 쨘 하고 바뀌었다는 느낌도 없었다. '미루지 않는다'는 느낌도 기대보다 강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루기, 즉 모든 일에 저항하는 몹쓸 기질과 평생 싸워왔기에 변화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 한번도 미루지 않은 적이 없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루지 않아 보았다.
미친...(험한 말) 이건 너무 신기하잖아.....